한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싫은 감정이, 미움이 생길 때. 우선 그것은 그것일 뿐이고 내가 싫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에 미워할만한 실체가 없음을 되새긴다. 싫음,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는 건 나로선 자연적인 문제이므로 나는 그 대상을 피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피할 수 없다면 내게 일어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불수자성 수연성'하면서, 대상의 요구가 받아드릴 수 없다면 'No, thank you'하면 그만이다.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시비할 것 없이. 미워할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워할 실체가 대상에 없다. 따라서 미워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아무 소용 없다. 반면 좋아하는 감정은 기쁨으..
1. 일체유심조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구조적결정론 : 유발할 수 있으나 결정할 수는 없다.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의 불가능성 2. 실체없음 실체는 없으나 작용은 있는, 무아. [작용은 인과] #1. 욕망과 무아 욕망하는 대상에는 실체가 없다. 욕망하는 대상은 내재적 욕망을 유발할 수 있으나 결정할 수는 없다. 욕망의 대상과 내재적 욕망의 일치는 그 대상에 원인이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른채 결과만을 받아들인다. 그 결과로서 욕망의 대상을 욕망한다. 내재적 욕망은 무상하므로 욕망의 대상도 끊임없이 바뀐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과 내재적 욕망의 일치는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우연적이다. 만일 대상에 원인이 있다면 일치는 수학공식처럼 영원할 것이다. 욕망의 대상에는 실체가..
누구에게나 지금 살아있다는 건 꿈 같은 일이죠.
1. 집착은 대상과 나를 동일시, 문제는 대상이 환상이라는 것, 실체가 없다. 집착을 알아차림. "꿈 잘 꿨다. 고맙다." 결국 집착은 [대상이 아니라] 꿈에 집착하는 것. 2. 꿈 인줄 알면 괴로울 게 없다. 괴롭다면 아직 꿈 속에 있는 것이고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이고, 꿈에 집착하는 것. 좋은 꿈(나쁜 꿈도)을 꾸고 깨어나 감사하며 안녕하고 새 꿈을 향해 걸어간다면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대 만땅인 설레는 삶, 새 꿈을 향해. [집착에서 깨어나] 3. 집착에서 어떻게 깨어날 것인가? 눈을 뜨고 꾸는 꿈에서 어떻게 깨어날 것인가? 우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깬다는 건 꿈을 꾸지 않는 것을, 꿈을 부정하는 것을, 꿈과 무관해지는 게 아니다. 다만 꿈 속에서 꿈인 줄 아는 것. 눈을 뜨고 꾸는 꿈인 ..
내게 있어, 무위는 삶의 한 태도인데, 이것이 옳고,다른 것은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운동은 그냥 좋아서 재미로 하지 건강을 위해 한다든지, 몸짱이 되기 위해 운동하지는 않는다. 먹는 것에 있어서도 몸에 좋을 목적으로 먹는 게 아니라 그저 먹고 싶어서 맛있어서 먹는 식의 함이 없는 활동, 무위로 행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공부, 등산, 취미, 직업, 춤추기 등등 삶의 어디서든 발휘할 수 있다. 물론 목표를 두고 끝내 성취하여 맛보는 희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 얘기의 포인트는 무위의 태도를 '나는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무위를 장려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다만 우리의 삶, 존재 뿐이 아니라 저 한이 없는 태양의 작용 속에도 깃들여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T.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이 본래 없음을 알아 언제든 필요한 상황이면 밥그릇이라도 못을 담아 쓰기도하고, 목불木佛을 땔감으로 사용해 추위로부터 목숨을 건지는 등등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진정한 지혜가 있다는 견해에 나 역시 동의합니다. 이는 누구나 일상의 체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자발성을 발휘하면 '지혜롭다', '능력있다', '머리 좋다', '예술이다'는 소리를 듣곤한다. 1.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 가령 예쁜 신발에 대한 집착은 신발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신발이 상하지 않도록 모신다. 그러나 예쁜 신발에 예쁨이 없는 관계로 예쁜 신발과의 동일시는 허망하다. 사물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괴로움은 모두 실체가 없이 허망하다,고 나는 말한다. 예쁜 신발에 대한 감사. 나에게 예뻐 보이는 신발이 있어 감사. 나는 예쁜 신발을 애용하고 그 혜택에 감사한다. 예쁜 신발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건 예쁜 신발을 소유하지 말라는, 신발을 멀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발과의 동일시를 그만 두는 것이고 신발 모시기를 그만 두는 것이고 그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신발이래도 나의 발을 보호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나를 안전하게 함께해 준 것에 대한 사물에 대한 감사는, 삶을 허망하게 만들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