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생각에 빠져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상대가 옳다, 잘했다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가 게임 중독에 빠지고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남편이 술독에 빠져 사는데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원인과 조건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 뒤에는 또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업의 흐름이 있습니다. 소나무가 절벽 위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까지는 일정한 조건과 주변 상황과의 상호작용이 있었듯이 사람의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일정한 조건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이전부터 쌓아온 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일어난 ..
어떤 사람의 집에 한 여인이 찾아와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아리따운 옷차림과 맑은 목소리에 단아한 외모를 갖춘 여인었습니다. 집주인은 신기한 마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여인에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공덕천입니다. 제가 가는 곳은 언제나 복이 쏟아진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거기다 복까지 준다니 주인은 몹시 기뻐하며 공덕천을 가장 좋은 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남루한 행색에 못생긴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며 찾아와 그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큰소리를 쳐댔습니다. 여링ㄴ의 행색을 보고 주인은 아연실색해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당신에게 줄 방은 없으니 다른 데로 가보시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흑암천이에요. 내가 가는 곳은 재앙이 따라다닙니다...
깨달음을 향한 네 단계 내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깨닫는 데에는 네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이 단계들을 간단히 설명한 후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반드시 버려야 하는 무지한 생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에 어떻게 비춰집니까? 그것은 마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 거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단계에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나'가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나 자신을 찾기 위한 분석을 통해서 나를 찾지 못하면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 안에서 나 자신을 찾거..
그렇다면 '나'의 실제 상태는 무엇일까요? 자동차가 바퀴나 축 등과 같은 여러 부분들에 의존해서 존재하듯이 '나'는 관습적으로 마음과 몸에 의존하여 형성됩니다. 몸과 마음과는 별개로 존재하거나, 혹은 몸과 마음 안에서 발견되는 '나'는 없습니다. 이름뿐 이러한 이유로 불교에서는 '나', 그리고 모든 다른 현상들을 '이름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나', 그리고 다른 모든 현상들이 단지 말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은 실제 대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뿐이라는 말은 모든 존재와 현상은 독자적 실체로서 스스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 그리고 다른 모든 현상들이 단지 이름과 생각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연기는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혹은 그밖의 다른 형태건 모든 무상無常한 현상들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T1000.0 : 연기緣起는 원인과 조건에 따라 즉 인연因緣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즉 공空하다. 모든 게 부처인 이유는 모든 게 연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연기를 보는 자 부처를 본다"고 했는데 무엇을 보든, 무엇을 하든 그것이 연기임을, 인연임을, 공임을, 있는 그대로를 본다면 부처를 보는 것, 곧 부처가 되는 길.
내가 궁금한 점을 질문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자비심을 느끼는 능력이 커진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사실 자비심의 정의에는 타인의 고통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도 바라지 않는데, 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맡길 원할까요? 대부분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약에까지 손을 댑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일부러 떠맡겠습니까?"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가 대답했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자비심을 갖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경험할 때 느끼는 고통과 크게 다르다고 난 생각..
"하지만 사랑이나 자비심은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사랑과 자비심이라는 감정은 그것이 집착과 섞여 있든 아니면 진정한 것이든 똑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두 가지 종류의 자비심에서 똑같은 감정이나 느낌을 경험한다면, 굳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달라이 라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진정한 사랑과 자비심은 집착에 기초한 사랑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똑같은 느낌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비심의 느낌은 더욱 강하고 깊습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과 자비심은 훨씬 변함이 없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낚시 바늘에 걸려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동물을 본다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그 고기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힘들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