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의 반복성을 신뢰하기 더욱이 우리는 모두, 우리가 만드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물들이 그것들이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또 그렇다고 믿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에 이것에 대해 모두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자연과 인공적인 "사물들"이 그것들이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 한 그것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것들에 작용하는 것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며,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들 안에서 변화들 - 만들어지는 방법에 의해 결정되어 발생하는 변화들 - 을 유발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설명원리/구조적결정론] 생명체계로서의 우리도 예외는 아니며, 분자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2.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실수는 그것이 일어났다는 순간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우리가 연속적인 계기들 속에서 일어나는행위들을 비교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에는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실수는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일어난다.(16) 실수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수가 현재에는 발생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수가 나중에 실수라고 불리게 될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발생하고, 성찰이라는 사후적 행동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우리가 하는 것'을 '하는' 그 순간에는, 그것을 나중에 실수라고 부르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 받아들..
우리는 각자 본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한 사물이나 사건을 한가지로 보지 않습니다. 각자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본다는 것을 보는 것과 남자들이 본다는 것을 본다는 것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인용하면, "일리노이 대학에 근무했던 제 동료중의 한명이 거의 믿을 수 없는 실험을 했는데 그 실험은 어떻게 외관상 하나의 똑 같은 관찰이 말로 옮겨지는지,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200명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건을 특징짓도록 부탁했습니다. 강의실을 가로질러 놓인 긴 끈 한쪽 끝에는 큰 공을 반대쪽 끝에는 작은 공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큰 공을 들고는 작은 공에 날아가 부딪히게 했습니다. 이게 일어난 일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남학생들..
달라이 라마의 와 하인츠 폰 푀르스터의 에 나오는 대목을 서로 비춰본다. 무지와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본래 모습을 보기위해 취해야할 자세는 "단지 그렇다고 여기는 것",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상은 그가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나의 화를 유발할 수 있으나 결정할 수는 없다. 그로 인해 화가 났다고 확증하는 태도는 무지와 전도몽상에서 비롯되며, 때문에 부작용의 과보가 생긴다고 나는 주장한다. 1. 원인과 결과의 연기에서 핵심인 의존적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은 단지 이름 뿐이고, 그렇다고 여겨질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이 확실해집니다. 단지 그렇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
1. 어떻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 조견 오온개공, 일체유심조의 이해와 성찰 2. 어떻게 마음을 정복할 것인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로 나는 것, 태로 나는 것, 습기로 나는 것, 화하여 나는 것, 빛이 있는 것, 빛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환상처럼, 꿈처럼, 번개처럼 ..
그렇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믿음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앎을 매개한다는 생각에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앎은 매개되는 게 아닙니다. 앎(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유기체에게 (누군가에게) 특정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설탕, 담배, 커피와 같이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 그런 대상, 물건 혹은 사물에 파악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와 반대로 앎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앎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발생 혹은 창조의 과정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이제 다르게 나타납니다. 배우는 사람은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으며 국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 받은 권위가 (선생님이나 교수가) 나서서 사실과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