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심直心이란 진여를 잊지 않는 바른 기억[正念]이다. 한 생각이 일어날때 깨어있으면 생사가 한 몸인 것처럼 일어나는 마음이 곧 깨어 있는 마음이고 한 생각이 사라질때 깨어있으면 생사가 한 몸인 것처럼 사라지는 마음이 곧 깨어 있는 마음이다. 일어나는 마음과 깨어있는 마음이 둘이 아니고 사라지는 마음과 깨어있는 마음이 둘이 아니니 한 생각 일어나는 게 알아차리는 것이고 한 생각 사라지는 게 알아차리는 것이 되어 알아차리는 마음이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는 있는 그대로의 진여를 잊지 않는 "곧은 마음[直心]"이라 할 수 있겠다. 만일 알아차리지 못하면 한 생각에 빠져 그외 모든 것을 잊게 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차려야 있는 그대로의 진여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늘 깨어있어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 지켜보기, 마음 내려놓기, 마음 쉬기는 허망한 집착에 의한 힘든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현재의 흐름에서 깨어 있는 마음으로, 마음으로 만든 것이거나 감각에 잡힌 것이거나 오고 가는 모든 대상을 지그시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욕망과 성냄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그것이 단지 허구의 '나'를 집착한 것에서 발생한 줄을 사무치게 알아차립니다. 그리하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으로 삶의 길을 걸림 없이 갑니다. 자유, 곧 '스스로를 말미암은 삶[자유]'이 되는 것이 '증득된 깨달음'입니다. 삶의 길에 깨어 있는 것이 부처가 되어 가는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수행 방법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조차 마음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집착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
분별과 차별로써 높낮이를 정하고, 이웃 생명들과의 연대에서 권위로 작용하는 지식으로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식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인연에서 함께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틀이 되어야 하며, 교조적 권위가 아니라 마음 쉼을 이끌어, 함께 살아가는 자리를 만드는 방편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늘 자신에게 깨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선의라도 다른 사람의 삶의 내용을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은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여야 하며, 그 삶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인연을 열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야 합니다. 선의라도 자칫하면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그 힘든 일이 기억으로 남아 다음날의 삶까지를 어둡게 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기 ..
앎을 갖고 있는 것은 집착이나, 앎이 새로운 인연을 이루는 현재와 조화를 이룰 때는 지혜가 되니, 함께 아름다운 삶을 펼쳐내는 도구가 되지요. 분별하고 판단하는 작용에서는 지식知識과 지혜智慧가 같은 모습이지만, 이루어진 마음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머물지 않는 판단을 한다면 지혜智慧가 되고, 이미 있는 이미지에 머문다면 지식知識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으면 바른 판단이 어렵고, 이미 있는 지식에만 머문다면 집착이 되기 쉽습니다. 이미지를 그리지만 그린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판단이어야 합니다. 지식이면서 지혜가 되어야 하고 지혜이면서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T1000.0 : 반야심경에서 '지혜는 없다[無智亦無得]'고 하는데 지혜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일 터. "편견과 전제 ..
'집착'과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은 서로 상대하여 그렇게 개념 지은 것이지만, 삶의 신비는 개념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그 마음에 고여 있는 시간의 기억이 기억인 줄 알 뿐만 아니라, 그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시비 등의 분별이 지금 여기의 삶에서 보니 허망한 것인 줄 알 때, 그 기억조차 현재를 새롭게 살게 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기억과 추상이 집착으로 있을 때는 단지 집착된 허구였을 뿐이지만, 허구가 허구인 줄 알 때는 기억도 지금의 삶을 이루는 다양한 인연의 한 축이 되면서, 마음마음이 온 세계를 다 드러내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와 같은 마음으로 보면 우리네 일상의 하나하나는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집착으로도, 지혜로도, 있다는 것으로도, 없다는 것으로도 규정할 ..
'새옹지마塞翁之馬'는 네이버 백과사전의 풀이에 따르면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이란 뜻으로, 세상일은 변화가 무쌍하여 길흉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길하다하나 흉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흉이라하나 길의 원인이 되기에 세상만사를 두고 흔히 쓰는 한자성어인데, 사실 주목할 것은 새옹의 말馬이 아니라 새옹의 맘心이 아니겠는가. 새옹의 마음은 말馬이 불러온 길흉 속에서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는 평상심의 도를 보여준다. 새옹지심塞翁之心, 변방 늙은이의 평상심은 "기쁨과 슬픔으로 들뜬 마음이 사라진" '청정한 알아차림'이고 '지혜'일 터. 새옹은 吉해도 행복하게 凶해도 행복하게 현재를 산 큰어른의 모습이 아닌가. 청정한 알아차림에서 보면 마음은 대상도 되고 분별도 되므로, 마음과 분별 그리고 대상이 실제로..
오온五蘊 가운데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알아차림으로 작용하고 있으면서 기억을 만들고, 만들어진 기억으로 현재를 재구성하면 있으면서 기억을 만들고, 만들어진 기억으로 현재를 재구성하면서 다시 기억합니다. 감각지각을 깨워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受, 그것의 이미지를 그리는 상想, 수와 상의 지각을 이어가면서 차이를 형성하여 알게 하는 행行, 앎인 식識, 이 모두에 깨어 있음과 습관적인 인식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진여와 생멸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감각지각이 깨어날 때의 깨어남은 새로운 알아차림의 전조이지만[正念], 그것의 반응 양상이 습관이 되면서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되므로 현재에 깨어 있지 못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妄念]. 상想과 행行 그리고 식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림에서 보면 깨어 ..
알아차림이 분명해지면 기억도 무상한 현재와 더불어 새로운 인식이 됩니다. 새로운 알아차림은 망념을 만들지 않으므로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지 않는 알아차림입니다. 이와 같은 앎을 '무념無念'이라고 합니다. 무념을 추구推求하는 것이 행복과 평화를 이끌어 냅니다. T1000.0 : 알아차림이 분명해지면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지 않는 알아차림. 다른 이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에도 내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과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싫은 소리도 하는 것. 싫어하는 마음으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으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알아차림의 행동일 터. 무념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각에도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