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심은 머물 수 없는 마음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공경받고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이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의 처지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는 것뿐이니, 칭찬 받는 것이 도리어 낯설 것입니다. 대비심이야말로 모든 생명들이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바탕이며 본체입니다. 대비심은 길러야 할 마음도 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마음으로, 생명이 있는 곳마다 넘쳐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제 색깔을 갖는 마음이 아니기에 만나는 인연을 빛나게 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으로 너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나의 마음 너의 마음으로 있기 이전에 이미 마음으로 하나이며, 하나인 마음에는 자신의 색깔이 없기에 나의 마음도 되고 너의 마음도 됩니다. ..
나를 형용하는 이름으로 나를 삼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몸짓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 밖에 다른 나가 있어 생각하고 몸짓을 나타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업에 매인 생각입니다. 인연을 등지는 생각이며, 등진 거리만큼 '나'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의 두께를 만듭니다. 그 두께만큼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을 이루는 두께를 녹이는 것이 참회입니다. 그러므로 업을 녹이는 참회참회란 몸과 이름을 세우기 위해 했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이름난 것이 나의 것이 아닙니다. 갖고 있는 것이 죽음 앞에 섰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듯, 이름 또한 그렇지요. 이름을 좇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고 이웃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상으로 채워진 이..
계율과 선행이 깨달음과 진여를 실천적으로 보여 주는 수행자의 삶이면서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계율에 머물지 않지만 계율을 어기지도 않고, 선행에 머물지 않지만 선행을 그치지도 않는 것이 보리심과 보살심을 닦는 것이며, 수행 가운데서 완성을 보여 주는 가장 현명한 지혜이며, 선행은 진여의 생명 나눔인 인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깨달음의 발로입니다. T1000.0 : 중도란 "계율에 머물지 않지만 계율을 어기지도 않고, 선행에 머물지 않지만 선행을 그치지도 않는." 그러므로 수행자는 진여를 잊지 않고 늘 떠올려 주시하면서 방편으로 선행을 해야 합니다. 선행은 악업을 다스려 진여의 생명을 인연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입니다. 정념과 선행이 습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번뇌 악업의 습관을 거슬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욕망에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나와 나의 소유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과 나와 나의 소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욕망인 의도에서 보면 둘 다 업을 짓는 것이지만, 한편은 번뇌의 괴로움을 증장시키는 욕망이고, 다른 한편은 번뇌의 업장을 덜어 내는 욕망입니다. 진여의 빈 자리나 인연의 총상에서 보면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지만, 별상인 한 사람의 삶에서 보면 늘어남도 있고 줄어듦도 있습니다. 곧 번뇌의 습관이 증장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며, 선업이 증장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번뇌의 습관을 줄이고 선업을 늘리는 의도적인 집중이 중요합니다. 빈 자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삶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들 가운데 인연의 공성에 치우쳐 함부로 사는 분..
선행이 부처님의 행동이며, 진여의 자기 표현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공성인 연기의 각성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형식적 계율에만 집착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계율이란 아집과 법집을 다스리는 데에 뜻이 있습니다. 계율 자체만 고집한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렇더라도 계율에 걸리지 않는 자유를 실천한다는 미명 아래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계율에 걸려 있는 것보다 더 큰 번뇌를 가져 오지요. 계율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집착과 계율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두가지 허물을 함께 짓고 있어서 입니다. 그러므로 '머묾 없는 선행'을 이야기합니다. '머묾 없는 것'이 집착 없는 공성의 표현이며, 그 마음으로 실천하는 선행이 진여의 인연을 드러나게 합니다. 계율이란 번뇌를 거슬러 가는 묘한 힘이 있어, 나와 나의 소유를 ..
선행善行은 마땅히 할 도리.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닌. 진여와 선행은 한 몸. 선행을 하는 것이 깨닫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선행 그 자체가 깨달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진여로서 하나의 생명임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선행을 '알아차리지 못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행이 깨달음을 위한 공덕이며 양식이 되는 까닭입니다. 선행이라고 해서 밖으로만 베푸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마음 쉼을 일깨워야 합니다. 또 선행이라는 행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하는 것에 집착하는 선행은 번뇌가 되어 선행을 하더라도 바른 결과를 맺기 어렵기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진여를 생각생각에 잊지 않는 정념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선행을 하여야 합니다.
생명 나눔이 이루어질 수 있는 '깊은 마음' 이 마음을 보고 느껴 알아차리는 마음이 믿음을 성취하기 위해 챙겨야 할 두 번째 마음으로 '깊은 마음[深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한 선행善行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비어 있지만 빈 마음이라는 어떤 것이 빈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모습을 고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연마다 마음이 되므로 마음의 형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연을 이루는 마음은 늘 앞의 인연을 비우고 새 인연을 이어가면서 '나'가 되고 마음이 됩니다. 이것을 '빈 마음'이라고 하며, '나 없음[무아]'이라고 합니다. 나도 마음도 분명히 있지만, '나' 또한 마음이라고 형상화시키는 순간, '나' 또는 '마음'의 실상과 어긋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