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마타 수행은 모든 경계가 하나의 마음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경계마다 분별하는 마음을 쉬고 마음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려, 마음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을 쉬는 것을 강조하여 '마음 그침[止]'이라고 한다면, '모든 인연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하나의 사유 주제에 머문다는 데서는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고 있는 마음[一心境性]'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망한 분별을 그치고[止] 분별을 그친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觀]이 '사마타관의 뜻을 따르는 것[隨順奢摩他觀]'입니다. '생각을 그치고 생각이 그친 상태를 다시 보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갖고 있는 분별을 놓고[止] 새롭게 보는 것[觀]이지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되, '마음'이라는 것조차 '마음 스스로가 마음..
'그침'을 "모든 경계상을 그친다[止一切境界相]."라고 해석하거나 "모든 경계를 그치는[止一切境界] 것[相]이다."라고 해석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분별을 바탕으로 그것이 만들어 내는 언어와 형상의 분별을 가지고 실재를 보려는 의식 활동을 그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분별인 일상도 자성이 없지만 초월된 상태조차도 자성이 없다고 사유해야 합니다. 무자성無自性의 사유가 일상이 된다는 뜻으로 '모든 경계상을 그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계의 분별을 넘어선 무상무상인 무자성적인 사유가 자리잡아야 됩니다. 무자성적 사유란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음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이미지는 만드는 공덕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를 비우는 자리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마음으로 이어가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자리에서 깨달음이 드러날 것이며, 깨달음 속에 다시 삼세를 담아낼 것입니다. 삼세를 떠난 자리에서 삼세가 새롭게 되니, 정진하는 걸음걸음마다 만족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삶은 수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만족이 늘 수행이 되는 자리입니다. 수행이 늘 필요한 것은 길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잃은 데서 보면 수행이 필요하고, 길 위를 걷고 있는 데서 보면, 곧 걷고 있는 것이 길[道]이 되는 데서 보면 걷는 것이 '완성 된 도道'입니다. T1000.0 : 길에서 길을 잃고, 말하면서 말을 보지 못하고, 보면서 봄을 못보니 속도가 의미가 없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말이란 것이 무엇인지, 본다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게 ..
정진이란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깨달음조차 무상無常이며 그곳에 생명이 안주하지 않는다는[無住]데서 보면, 늘 '새롭게 살기'일 뿐입니다. 그것이 정진이면서 깨달음이 되지요. 새롭게 되기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항상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 그것이 늘 새로운 생명의 활동입니다. 그것은 형상을 만들면서 형상을 넘어서고 언어로 표현되면서 언어로 걸리지 않는 것이지만,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과 언어를 넘어서지만 형상과 언어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의 활발한 인연이 어떤 형상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며, 언어표현으로 생명의 '새롭게 되기'를 다 나타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생명이란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를 욕망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참는 것[忍辱]'을 통해서 신심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수많은 인연들은 한 사람의 의지대로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연을 맞이하고 보내는 마음에 의해서 고해苦海를 만드는가 열반涅般을 사는가를 가름할 따름입니다. 인연따라 마음이 움직이면 하루에도 수천 번 고해와 열반을 만들 것이며, 인연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열반조차 없겠지요. 인연에 담담한 마음을 열반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해가 없으니 열반이라는 이름도 없습니다. '참는 것'도 욕망이고 집착하는 마음을 쉬는 것이지만, '인연을 따르는 마음'에는 욕망에 흔들리는 마음도 없고 집착을 쉰 마음도 없습니다. 마음이 인연이 되니 잡으려 하지도 않고 보내려 하지도 않습니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보낼래야 보낼 수 없는 것이 인연..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는 것이 '탐욕貪慾'입니다. 욕망하는 것은 마음작용의 기본 가운데 하나이므로,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욕탐은 대체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필요하지도 않는 것들을 쌓아 두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비교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이것저것 갖고 있는 것 또한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갖고 있다는 마음으로 만족하는 것이니, 물건이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교가 만족과 만족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고 하겠습니다. 비교를 통해서 만족하고자 해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고 필요한 만큼으로 자신의 삶을 살면서 그 밖의 재물 등을 이웃과 나눈다고 하면 삶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바라지 않고 보시를 하고, 다른 사람의 공경을 바라지 않고 보시를 합니다. 그것을 바란다면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 되고, 부족한 마음만큼 행복하지 못하겠지요. 보시한 인연의 삶 그 자체를 완성된 깨달음의 삶으로 이해하고, 그곳에서 만족과 평온과 행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T1000.0 : 바라는 게 없는 보시는 부족한 게 없기 때문. 무엇을 바라고 보시를 한다면 보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고 바라지 않고 하는 보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의 보시.
한 생명은 인연 가운데 하나의 생명이지만 그 자체로 온전한 인연을 다 드러내는 인연의 총상으로 자신의 우주를 구성하고 사는 생명입니다. 인연을 이루는 데서는 같다고 하지만 인연을 드러내는 양상은 다 다릅니다. 생각 하나도 그것이 인연을 다 드러내는 데서 보면 같다고 하지만 생각의 양상에서 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일상의 삶에서 만족과 평온과 행복을 느끼는 것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이루고 사는 것이며, 이웃 생명을 대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척도를 이웃 생명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인연과 어울릴 때는 이전의 이해만으로 새로운 인연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전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