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과 대답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 쓰고 있는 '자연업自然業'이라는 말입니다. 자연自然은 지나온 시대의 모든 언어를 다 담고 있으면서도 언어를 무상한 인연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흐름입니다. 과거가 현재에서 읽히고, 시간의 길이를 잴 수 있는 것이 그 증거가 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데서 보면 늘 현재로 시간의 폭이 있을 수 없지요.그러나 시간은 늘 현재의 자기 시간을 인연으로 읽고 있으면서 그 시간 속에 과거를 담고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간의 폭이 되어, 현재는 삼세三世를 다 담는 현재가 됩니다. 언어도 시간처럼 현재에서 과거를 드러내지만 과거에나 머물지 않고 현재를 재창조하는 인연의 흐름으로 있을 때 인연의 저편에 있는 언어가 아니라 인..
본래 '깨달음'도 '깨닫지 못함'도 없었습니다. 인연의 흐름만이 있습니다. 인연에서 형성된 앎의 기억이 현재의 앎을 가리면서 현재가 어둡게 되어, '깨달음'과 '무명'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명이 형성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이해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수행으로 시각始覺을 지날 때 비로소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인연이 각성임을 자각합니다. 법의 본바탕이 밝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각이 무명화됐다고 하기 보다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본각도 무명도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의 깨달음이 없다고 하면 무명이 무명일 수 없으며, 본각도 본각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삶을 새롭게 보는 근본적인 전환이 될 수 있는 것..
알아차리는 마음도 머물지 않고, 알아차릴 대상도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면서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인연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선정禪定'의 완성[波羅密]'을 향해 가는 마음입니다. 선정이란 집중된 마음상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공성에 대한 통찰이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에서의 선정바라밀은 공성을 바탕으로 한 진여문眞如門과 본각이 없어지고 망념이 생겨나는 과정과 망념이 없어지고 시각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생멸문生滅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思惟], 그 마음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는 것[修]입니다. 마음이 대상을 따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대상을 마음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사무치게 알아차렸다고 하면 마음이 바깥 ..
부처가 되기 위해서 정진하나 이 몸을 떠나서 부처가 없고, 조사를 넘어서기 위해 정진하나 마음자리 하나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조사의 경지를 다 드러냅니다. 부처상[佛相]도 없고 조사상祖師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 부처상이나 그 마음도 머물지 않으니 하나만의 부처상이 없습니다. 또 근본 스승인 부처조차 뛰어넘는 분을 조사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의 마음이 조사조차 새롭게 만들고 있는 조사가 되면서도 조사 자리에 머물지 않으니 하나만의 조사상도 없습니다. 몸과 마음의 머묾 없는 인연이야말로 부처와 조사를 다 뛰어넘는 현재입니다. 정진은 정진 그대로가 정진의 완성이니, '실재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허망한 집착을 떠난 진여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부터 인연을 다 드러내는 무상..
이미 갖고 있는 것 버리기 어렵고,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 또한 버리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일을 참아 내면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이지만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바탕이 본래부터 만족된 것이니 무엇을 가지려고 욕망하면서 아파할 이유도 없고, 갖고 있는 것이 본래부터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아, 그것이 없어진다고 성냄으로 스스로 상처받을 이유가 없음을 알고 참는 것입니다. 욕망과 성냄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고[해] 인욕을 실천[행]하는 것입니다. T1000.0 : 욕망에 관해서 덕산선사의 화두를 빌어 말하면 욕망해도 30방, 욕망하지 않아도 30방이다. 인욕바라밀은 이 30방매를 피할 수행이다. 그런데 욕망을 참는데 집..
욕망하는 것이 이미 갖추어 있다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겟지요. 갖고 싶은 것이 욕망의 대상이 될지니, 욕망하는 순간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계율은 그와 같이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드는 모든 일을 경계하게 하는 지침입니다. 계율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부족한 것이지요. 마음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합세하여 이곳저곳으로 욕망의 대상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채워질 것처럼 헛되게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마음 밖을 향한 들뜬 심정을 가라앉게 하고, 이미 봄[春]이 만개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계율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형상에 머무는 계율을 경계합니다. 형상으로 남는 계율은 계율로 자신을 세우는 허물을 짓습니다. 그러나 봄이 이미 마음 가운데 만개한 ..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을 실천하는 이유는 보시라는 선행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연법이 만들고 있는 세계는 본래부터 집착이나 욕심이 없는 세게임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소유를 비우고 나누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비우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나눈 것이 '나'입니다. 다 비우고 나눈 자리가 인연의 공성이 드러난 자리이며, 진여인 법의 본성이 빛나는 자리입니다. 나의 것을 비우고 '나'조차 비운 자리가 본연의 나이면서 '나'라고 할 수 있는 나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인연이 드러난 그대로가 온통 '나'이며, 그 '나' 밖에 다른 나는 없습니다. '인연이 나'이기 때문에 삶은 수행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성된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돈오頓悟'라..
이와 같은 믿음이 성취된 이후 그 믿음에 따른 앎과 실천이 더욱 깊어지는 단계가 '해행발심解行發心단계입니다. '마음 빔'이 도道인 줄 알고 빈 마음의 실천이 도를 향해 가는 길이면서, 도道 그자체를 현재에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밝게 하는 힘[解]'과 실천[行]'이 함께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마음에 담겨 있는 허망한 집착을 따라 밖으로 떠돌지 않는 것이 언제나 쉬어 있는 마음의 본성이며 가야 할 길[道]임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T1000.0 : 마음 쉼이 道임을 분명히 안다. 한편 무위無爲, '함이 없음'은 "허망한 집착을 따라 밖으로 떠돌지않는 것이 언제나 쉬어 있는 마음의 본성"임을 말하는 노장사상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삼교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