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일상의 인식 너머에 있는 특별한 상태를 깨달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모습 그래로 법신의 모습이 되고, 자유로운 생각 그대로 법신의 생각이 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뭇 생명들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되, 동일한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뭇 생명들의 모습 그 자체가 법계의 모든 인연이 담겨 있는 몸인 법신法身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몸을 떠나서 특별한 형상을 한 법신이 없고, 특별한 형상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몸과 마음이 모두 법신의 몸이며 법신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합니다. 하는 것마다 모두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근본으로 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에 근거한 사유가 일상의 사..
앞서 말씀드린 여섯 가지 장애가 없는 수행자와 이미 장애를 넘어선 수행자라면 진여삼매를 체득할 것이고, 진여삼매에 대한 체험으로 법계가 자성 없는 공성의 인연으로 하나 된 세계임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특별한 이념이나 형상에 귀속된 삶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 삶'이나 '무엇으로의 삶'이 아니라 인연의 어울림에서 독특한 개체를 현재에서 드러내는 삶입니다. 인위적인 모든 분별이 그칠 때 살아 있는 현재가 삶의 전체가 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분별된 인식 틀에 맞춘 삶이 아닙니다. 성인의 삶을 닮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추어진 것으로 만드는 것을 중단한 자유로운 삶이며, 스스로의 내적 이유로부터도 자유로운 삶을 뜻합니다. 모든 ..
수행이란 자성을 갖는다는 분별을 그치고 자성 없는 인연의 각성을 실증하는 것으로, 중생의 업을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출발도 쉽지않지만 갈수록 업의 저항이 커지므로 이 길에 대한 사무친 이해와 각오가 없으면 결코 거슬러 올가가지 못합니다. 스스로 수행 의지를 잘 정립하여야 하고, 무분별의 인연으로만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깊고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며, 이와 같은 이해가 실천으로 드러나도록 치열한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T1000.0 : 흔히들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런 표현에 따르면 수행의 과정은 지은 바 업장과의 결투가 될 것인데, 용맹정진의 각오가 아니고서야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다. 각오를 단단히 세우나 업장이 두터워 꼼짝도 안한다면 참회와 선업을 행해 수행의 힘을 익혀야할 것이..
수행이 익어지면 경계 따라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마치 맑은 거울이 영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하나가 경계가 되었습니다.[心一境性]'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마타관에 수순하는 것입니다. 정념正念으로 마음이 경계에 따라 흔들리지 않게 되면[心住], 힘들지 않고 분별하는 마음을 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쉰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정념의 알아차림이 더욱 분명하게 되면, 연기의 각성인 공성의 변화를 따라 들어가게 됩니다. 연기의 공성에 들어가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도 망념의 분별이 없는 진여삼매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바로 선정에 든 것입니다[正定]. 모든 분별이 인연의 각성으로 하나 된 세계이며, 그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너와 나의 ..
마음이 경계를 따라 흔들릴 때마다 경계가 허상이며, 허상을 좇는 마음조차 허상이라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경계를 좇는 마음을 거두어 분별이 허상임을 아는 마음[正念]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생각생각이 꿈과 같으니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인연은 그 자체가 무상이라 어던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 마음입니다. '오직 마음 뿐'이라는 바른 뜻[正意]으로 경계도 마음도 '얻을 수 없다[不可得]'는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수행이 익어지는 것입니다. T1000.0 : 깨어있기[正念], 오직 마음 뿐[正意], 무소유[不可得]로 이어지는 생각이 '활동 되기'가 수행. 소유하고 있으나 소유하지 않는 것과 같고 소유하지 않고 있으나 소유한 것과 같은 소유함에 있어서 소유에도 소유하지 않는 것에도 머물지 않..
인연이란 어떤 결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도 결정돼 있지 않고 결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 때 그 전 찰나가 그 결과에 대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늘 같은 결과를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정된 원인일 수 없습니다. 인과 관계가 분병하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도 없고 결과없는 원인도 없지만, 결정된 원인이나 결과는 없습니다. 인과의 근본 원인으로 육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육계관六界觀이 연기를 살펴보는 하나의 인식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아직 충분한 무자성적 사유가 아니므로 부처님의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수행자를 위해서 육계관의 수행이 제시된다고하는 하지만 그 한계에 대한 철저한 살핌이 없다면 원인인 육..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일상의 욕구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해탈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갖고자 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 되어서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경험조차 자신을 옭아매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별은 마음이 만들고 있다."라고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불교 수행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얻을 것'도 '얻는 나'도 없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호흡에 의지해서 특별한 상태의 나를 만들려고 한다면 불교 수행이 아닙니다. 불교 수행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연법에 대한 이해와 인연법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인연법이란 수행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삶의 본래 모습입니다. 수행은 본래 모습..
사마타관[止觀]과 위빠사나관[觀觀]의 수행으로 인연마다 마음이 만든 줄 알고[止觀], 인연 따라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허깨비인 줄 알며 쓸데없는 집착으로 힘들어하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길러[觀觀], '머묾 없는 마음[無住心]'으로 '마음조차 없는 마음[無心心]'을 증득하여야 대승에 대한 신심을 성취합니다. 지관 수행으로 신심을 성취한다는 것은 인연이 마음이며, 마음이 인연을 인연 되게 하는 것임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법계가 한마음이며 한 생명이라는 믿음이 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인연이 마음이 되니 마음조차 없다는 데서 진여의 공성을 믿고, 모든 인연을 통해서 진여의 공덕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음 그침인 '지수행'과 인연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관수행'을 같이 닦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