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미묘한 차이를 인식함과 동시에 인식된 차이가 그 자체로 남겨져서 뒤 앎을 지배하면 그 순간 바로 앞찰라에 청정한 의미로 알았던 것이 바로 뒤찰라에 妄識이 되버린다. 똑같은 인식활동이 그 자체로 청정한 식에 활동이 되고 그 자체로 망식이 된다. 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 삶을 연기적 관계로써 한 생명을 원활하게 나타난 언어도 되고 동시에 다음 찰라를 지배하는 언어체계로 남겨질 때는 우리에게 妄想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속에 망상이 남겨져 있다고 해서 삶 자체로써 이야기하고 그것을 종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잘못되어져 있는 상태가 남겨져 있는 것을 특히 종자라고 한다. 인연처에서 식이 자기모습을 나타내면 여력을 남기지 않는다. 알긴 알되 현재를 철저히 앎과 동시에..
"보고,듣고,맛보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것을 그렇다고 결정된 어떤 인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밖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냐, 존재한다. 헌데 우리가 보고있는 이 상이라고 하는 것으로 밖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밖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처에서 온갖 것이 개체이면서 동시에 한생명이고, 나도 한 개체이면서 동시에 한 생명이 온생명에 관계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명이게 하는 그런 관계를 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상을 지우는 순간 그것은 나와 더불어 함께 생명을 공유하는 생명을 만들어가는 인연으로서 자리잡지 않는다. 그와 같이 보는 상은 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요. 함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은 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식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즉 배고픔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말한데로 여러가지 있겠지만 우리의 몸속에 들어있는 당이 얼마만큼 부족하는 가가 허기로 나오는 거죠. 배고픔이 있는게 아니라 당부족인데, 그 당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몸전체하고 상대해서 말한다. 사건은 배고픔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몸 전체와 상응했는데 배고프면 우리가 뭘 끌어오느냐 뭘 먹어야 되죠. 이 상태에서는 배고픈 상태가 단순히 배고픈 상태로 있는게 아니고 허기진 상태로 있는게 아니고 '밖에서 에너지를 충전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을 같이 하는 것이다. 먹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몸 전체가 배고픔이라고 하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데 그 사건 속에는 그러므로 몸 밖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라는 신호다. 온 전체가 이 사건을 만들어서 ..
"허망분별 하니까 사는 것이 너무나도 허망한 듯 보이지만 그 허망분별이 보일때 비로서 온전한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다. 왜 완벽한 깨달음을 이룬 후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허망분별이다. 허망분별은 원성실성 다음에 나온다. 순서를 말할때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의타기성을 말하고 원성실성을 말하는데 실재로 살면서 허망분별이 완벽하니 이해되어 있고, 이해될 뿐 아니라 허망분별을 철저히 사는 때는 원성실성을 완전히 경험하고 나서일때이다. 그것에 의미는 허망분별해야 부처님께서도 일체 인연처에서도 자기 삶을 고집하지 않고 망향관계에서 연기법을 드러내서 삶을 안온하게 만드는 역활을 한다. 만약 부처님께 삶에 자기 특성이 있어서 자기 특성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주장하게 되면 두 관계의 삶속..
기신론에는 범부가 어제 한 일에 대해서 잘못을 알고 오늘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을 凡夫覺이라고 이름하면서 동시에 不覺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覺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不覺이고 좋지 않은 의미에 있어서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근원적으로 我와 法이라고 하는 것을 허구로 세워놓고 그것에 따라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맞춰서 흘러가게 두면 우리에게 좋은 삶이 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 상의 전환은 우리에게 내재적으로 전재해서 변화가 오는 것인데 즉 피해의식 속에 識에 의해서 변한 바다. 피해의식 또 차능변무상. 能變이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근데 자각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요. 능동적으로 욕심내고..
인은 연을 따라 과가 다르며, 이 과는 곧 다음의 인이 된다. 연이 바뀌면 과가 다르겠지만 인의 변화가 없으면 고는 재발된다. 흔히들 문제가 생기면 돌파구로 환경을 바꾸려한다. 학교나 직장을 옮긴다든지. 환경이 바뀌므로 그 과도 달라지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재발할 소지가 있다. 근본 문제인 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이 바뀌면 어떤 연을 만나도 이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문제가 생기면 밖을 보려하지말고 안을 보아야 근본문제가 해결된다.
행行에서는 아와 법의 명확한 분별을 할 수 없고, 식에서만 합니까? 수상행이 순서적으로 어떤 관계를 갖기는 하겠습니다만, 나름대로 특성을 가진 마음작용 중의 하나입니다. 수는 수 나름대로 의意의 분별을 동반하며, 상과 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와 법의 분별은 식장이 이루어지자마자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행의 식장[眼識 등]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종자로서 '분별의 경향성을 상속'합니다. 아와 법을 분별할 수밖에 없게끔 구조적으로 가꾼 힘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식에 와서 분별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앞에 분별되어서 수상으로' 일어납니다. 근본적인 무명의 힘에 의해서 분별된 식의 흐름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힘을 거슬러 올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간다는 것, 지켜본다고 하는 말..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식의 작용입니까? 앞에서 식은 마당이고 마음의 작용인 심소가 그 가운데 활동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이[인식주관], 무엇을[인식대상] 아는 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관계로 형성된 앎만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수나 상이나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수상행만 있을 뿐입니다. 마당을 펴면 그 가운데 저절로 수상이 있게 되는데, 이때 분별의 행으로 가지 않고 수상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즉 식[마당]에 수상[활동]만 있는 것으로서,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이 만나서[識] 수상으로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때 무엇이 있어서 수와 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수와 상이 저절로 앎으로 나타납니다. 앎[식]은 저절로 아는 것이 속성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