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는 삶을 나와 대상으로 나누고,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면서 총체적인 흐름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소외현상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벗어난 자유와 열반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괴로움이 우리 삶의 중심이 아니라 자유와 열반이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아이가 여럿이 놀고 있는 놀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즐거움과 일체감을 얻고, 소회감으로부터 받았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듯이 총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자기 모습을 회복하고 열반으로 살게 됩니다. 열반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행동양식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것[탐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밀쳐 내려고 하는 것[..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나를 분노케 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분노케한 것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지만, 분노한 것에 대한 과보는 어떤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로 스스로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나를 분노케 하던 사건에서 펴안해진다고 하면 스스로가 평안의 부처님 세계를 사는 것이며, 이 힘이 나를 분노케 한 사람에게까지 평안의 부처님 세계의 기운을 보내는 결과까지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자량위 수행은 보다 윗단계의 자량을 축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부처님의 세계를 스스로와 이웃에게 여는 것입니다. (유식 30송 54)
시간을 유식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보통 우리의 삶을 탄생과 죽음의 연장선으로 보고, 과거, 미래, 현재를 나눕니다. 그런데 삶은 한번도 과거에 있지 않았고, 미래에도 있지 않고, 전6식, 제7식, 제8식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변화하는 현재 이 순간밖에 없습니다. 지나온 과거의 모든 것들의 자기 상속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미래를 추상하게 하는 것이 분별하는 힘인 종자상속입니다. 상속된 종자 속에 그와 같은 기억과 추상이 들어 있어서, 과거시점과 미래시점을 구별하여 시작과 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으 매순간 일어난 변화 자체가 전체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 속에는 시작과 끝이 구별될 수 없습니다. 모든 흐름이 한 순간의 절대적인 생명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 그것 외에서는..
우리의 삶은 보고 듣고 느끼는 한순간 한순간이 전체의 자기 표현이며, 유식에서는 이를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이 어우러져 있는 앎의 흐름이라고 합니다. 이 어울림의 세계는 객관에서 주관을 떼어 낼 수 없고 주관에서 객관을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어우러진 전체로서의 우리의 삶을,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따로 떼어놓는 힘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무명은 모든 인식현상에서 항상 동반되지만, 특히 제7식의 작용인 나를 세우는 힘으로 분명해집니다. 무명의 분별작용을 통해서 삶의 각각을 고정화된 실재로 파악하는 현상을 법화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인 전6식의 장에서 법와에 의해서 선악시비와 분별대립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내 것, 네 것'의 소유를 증대시키면서 무명을 더욱 굳게 합니다. 무명과 법화가 전..
1. 그런데 책상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책상이라는 사물이 눈앞에 없더라도 같은 이미지가 항상 떠오릅니다. 이는 책상에 대한 인상을 고정시켜서 말로 표현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사물을 그와 같이 보게 되는 힘, 곧 종자가 책상이라는 영상을 동일불변의 실체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의 실제는 만남의 조건에 따른 변화이지만, 말의 영상은 늘 일정하게 됩니다. 책상의 변화가 언어로서의 고정된 이미지인 책상이라는 틀에 의해서 얽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책상이라는말이 책상으로부터 파생된 것 같지만, 책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언종자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생각이 현실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유식이란 '관계 속의 변화인 연기가 앎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유식은 '삶의 부분이 아니라 삶 자체'라고 했습니다. '앎의 관계'라는 뜻이며 부득이 관계를 나누면 아는 쪽[견분]과 알려지는 쪽[상분]이 있게 됩니다만, 이는 동시적이며 함께 변화하는 흐름으로 있습니다. '앎의 흐름이 곧 식'이며, 흐름이란 결정됨이 아니라 변화를 의미합니다. (유식 30송 44) 우리들의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관계맺음의 현재적 표현이며, 앎으로 그 자신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앎이 있어서 무엇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 그 자체가 관계를 통해서 앎으로 표출된다는 뜻입니다. (45) 견분과 상분이 함께하고 있는 앎의 장이 연기실상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 총체적인 세계입니다. 앎의 연기이..
식은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근과 오경, 의와 법으로 이루어진 전5식과 제6식, 의의 자기 소외의 힘인 제7식, 총체적인 장으로서의 제8식입니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삶이 청정한 유식성이지만, 의의 분별작용에 의해서 아와 법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삶이 영위되며, 이는 식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의의 분별작용입니다. 매순간 깨어 있음과 습관적인 인식태도에 의해서 청정과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적 삶인 식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 전체의 흐름에서 의가 갖고 있는 습관적인 인식태도를 버리고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에 여실히 깨어 있어야 됩니다. 깨어 있게 되면 청정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습관적인 인식태도를 버리지 못할 때는 언어관습에 벗어나지 못한 분별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