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식이라는 말에는 청정과 분별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청정의 삶은 주객의 만남인 연기의 삶 자체가 저절로 가장 조화로움을 지향하는 근원적인 앎을 말합니다. 분별의 삶은, 아와 법을 인식의 기준틀로 삼는 조화롭지 못한 앎의 세계를 말합니다. 청정과 분별은 연기의 삶, 곧 식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서로 다른 인식의 근거를 가지고 앎을 이루고 있는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유식 30송 40) T. 유식의 두 가지 뜻, 청정과 분별. 청정과 분별 사이의 중도! 우리는 청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분별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거짓인 관점이 아니라 둘 사이의 중도를 찾아가야한다. 2. 삶 자체는 주관과 객관이 항상 어우러져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식주관과 인식 대상은 언제나 ..
주관과 객관이 연기라는 장에서 앎으로 관계맺음이며, 앎에 의해서 관계가 조직되는 것입니다. 앎의 관계가 저절로 인연의 모습으 나투면서 흘러가는 것이지요. 이 흐름에 깨어 있지 못할 때, 곧 무명이 작용할 때의 앎의 장은 감각기관과 생각에 의해서 조작되고 제 특성에 맞게 아와 법을 규정하고 분별하는 법화의 조직화가 일어나며, 이 법화가 다음에 일어나는 앎의 장을 왜곡시키면서 분별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이 법화되어 선악시비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된 장 속에서만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아법분별로써 잘못 알고 있지만, 우리의 삶 자체는 저절로 아는 연기의 흐름에 바탕을 둔 유식성이라는 것이지요. (30송 40) T. 잘못..
근원적인 분별[무명]이 중생의 삶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언어분별로 표출된 행위입니다. 또한 언어로 나타나기 이전의 분별력을 명언종자라고 하는데, 중생의 삶은 명언종자와 이의 현행으로 인한 본질적인 삶의 왜곡이며, 이 힘은 순간순간 법화를 이어가면서 삶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변하며 흐르는 우리의 삶에서 흐름의 동질성 내지는 유사성 [비슷한 조건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을 취하여 개별적인 실재로 아는 힘이 분별입니다. 우리의 삶은 총체적인 관계 속에서 개별적인 유사성의 흐름이며, 무상한 변화이며, 연기실상인 청정한 창조성의 흐름입니다. 즉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하나 된 상태가 연기실상의 청정한 흐름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 된 앎의 흐름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 된 앎의 장에서는 나와 법의 나뉨은..
한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지금 여기서의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며, 지켜보는 힘이 커지면 생각에 따라가지 않고 생각의 흐름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욕을 들으면 기분 나쁜 감정이 일어납니다. 욕이라고 하는 개념[고정화]과 그 욕을 통해서 기분 나빠하는 감정[갈등]으로 동요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행을 계속하면 욕을 듣고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니, 순간적으로 욕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알아차리게 되고 이 힘에 의해서 곧바로 고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삶을 여실히 지켜보는 힘이 생기면서 분별하는 힘이 약해지면 고요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이 힘이 커져 무아를 여실히 알게 되면 보살의 분청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모든 번뇌의 종자가지도 정정하게 되어 언제 어느..
유식이란 '관계 속의 변화인 연기가 앎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유식은 '삶의 부분이 아니라 삶자체'라고 했습니다. '앎의 관계라는 뜻에서 부득이 관계를 나누면 아는 쪽[견분]과 알려지는 쪽[상분]이 있게 됩니다만, 이는 동시적이며 함께 변화하는 흐름으로 있습니다. '앎의 흐름이 곧 식'이며 흐름이란 결정됨이 아니라 변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허망한 분별로써 우리의 삶을 관계의 변화인 앎의 흐름으로 보지 않고 결정된 것으로 보면 필연적으로 소외와 왜곡이 생기는데, 수행을 하여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44) 우리들의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관계맺음의 현재적 표현이며, 앎으로 그 자신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앎이 있어서 무엇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 그..
이와 같이 한 가지의 앎 속에는 개인과 사회와 역사의 인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앎의 전 과정이 이미 사회와 역사의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앎의 결과인 자증분 속에는 이미 그것을 증명하는 사회적 인식인 증자증분이 들어 있으며,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통해서 앎의 지평을 열어가기 때문에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서로가 서로의 인식근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식 관계는 이 넷을 다 갖추고 있는데, 앎 자체가 총제척인 우리의 삶이며, 상호작용하는 연기의 장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관계 속에서 자기 변화를 계속하면서 상속되어 갑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상속은 유사성을 띠게 되므로, 언어생활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삶이 인식 속에서 고정화되면서 연기관계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삶 자체는 주관과 객관이 항상 어우러져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은 언제나 어우러져 있는 하나의 장면이면서 그때그때의 연기관계에 따라 제 모습을 나툽니다. 곧 마음과 대상이 어우러져 하나 된 식장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가 앎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변화만을 통해서만 사물을 파악하는 우리의 눈과 귀로는 전체적으로 늘 함께하는 흐름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 8식은 알수 없다'라고 합니다.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