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대체적으로 들으면 자기 자아를 부정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듣기가 싫은 것이다. 또하나는 같이 자아를 부정하는데 내가 잘났는데 我慢心을 다치기 때문에 싫어한다. 둘다 서로 자기 아만심이나 자아를 다치지 않는 쪽에서 적당히 타협을 해서 계속 이 자아를 끌고 가는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는 수행도상에 있다고 하면서도 세간지를 증득시켜가는데 이 세간지야말로 우리가 알아야할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말로 표현된다. 이 모든 생각들이 끊임없이 자아를 증장시켜서 나를 세우는 쪽에 의지가 작용하게 된다. 말을 그치고 생각을 그치고 말을 하려면 자아를 정말로 해체시키는 쪽의 말을 늘 듣고 하려고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말을 하든지 즉 ..
"不思議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면 저 사람이 나쁜 일을 많이 했으니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나를 성내게 했으니까 내가 화를 내서 이 사람을 눌러서 화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렇게 하면 이 사람은 물론 과보가 안좋지만 나 스스로도 과보가 안좋다. 우리가 일상의 상식으로 흐르는 삶과 우리가 내적으로 갖춰진 본래적 삶과는 항상 어긋난 일이 많다. 상식으로 당연하게 생각된 일들이 깨달은 이후의 상황에서 비춰볼때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화를 내야할 당연한 상황에서 화를 내야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이 된다. 한편 칭찬해야할 상황에서 칭찬하는 것조차도 너무나 잘못된 상황이다.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면 곧 그것이 대체적으로 칭찬하면서 탐심을 증진시켜가고 성내게, 비난하..
"아무 원인이 없고 다른 사람이 와서 나를 화내게해서 내 마음 가운데 화가 커지면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 화가 전체 사회에 미치도록 준비되어 있다. 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탐심과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철저히 받아야할 과보임에도 불구하고 바꿔말하면 이것이 모인 사회적 총량이 또한 그 사회에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할 공통적인 과보가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면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그러한 것들이 가지가지 생각들이 실재는 그 생각 자체가 나다." T1000.0 : 화를 참는 것이 화를 푸는 것보다 더 위험한데 화가 안에서 점점 커지기 때문으로 참다참다 터지면 더 크게 일이 벌어지는 이유다. 화를 참는 것도 화를 푸는 것도 다 나라는 생각때문에 이뤄지는 것으로 나에 대한 생각을 고집하지..
"비유를 들면 다른 사람이 이런저런 일로 힘들게 해서 성이 나면 나에게는 아무 원인이 없고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의해서 성내는 사건이 만들어졌다. 다른 사람은 나를 성내게 했으니까 나를 성내게 한 과보를 받겠지만 성낸 것 자체에 대한 과보는 철저히 내가 받는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나를 성내게 했을지라도 성낸 그 자체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한번 성내면 한번 성낸 만큼 자기 삶이 힘들어진다. 아무리 안좋은 일이라도 성을 내지 않고 그 일을 처리해 나가야할 당위성은 스스로가 편안하고 열반의 삶을 누리고자 할때는 극력으로 아무리 싫은 일이라도 성내지 않으려고 극진히 노력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한번 성내면 성낸 만큼 자기는 마음 속에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인연처가 되면 그 과보를 스스로 받는다..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변계소집성에 의해서 그렇게 집착되서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 확실히 알고 말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그렇다면 비춰진 사물들은 또 어떤 것들이냐, 비춰진 사물들은 우리 마음상태가 어떻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비춰지기 시작한다. 止가 깊어지면 과거의 말을 통해서 비춰지던 사물들의 기운들이 다 쉬게 되면 드디어 말의 얽매임 없이 사물을 보게 하는 힘이 생기면서 생각하는대로 사물이 비춰진다. 그전에는 이미 가립된 즉 언어를 통해서 세워진 영상이 비춰졌는데 이제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사물들이 늘 새롭게 비춰지기 시작한다.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사물이 매순간 새롭게 비춰지기 시작한다. 이로써 觀行이 깊어지기 ..
"우리가 매일 말을 열심히 하면 수행자가 원성실성을 통해서 자기근거를 매순간 없애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되는데 많은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변계소집성의 삶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한철 수행할때 정말 필요한 말 이외에는 될 수 있는데로 줄이고 특히 칭찬이나 비난에 말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확히 지켜가는 것이 假立된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중의 하나다. 말이야말로 하는 순간 그 말에 바탕자체가 원래부터 假立되면서 변계遍計 즉 사유에 의해서 그것이 있는 것처럼 집착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 특징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는 업이 되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마치 말에 흐름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서 스스..
"점점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로부터 떨어져서 이름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와 같은 이름은 무엇에 의해서 성립되어졌는가, 철저하니 사유에 의해서만 성립됐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에 붙여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사물이 이름을 만들어내는게 아니고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을 그렇게 보도록 되어있는 자기 생각을 통해서 사물에다 그런 이름을 붙여준다. 그와같은 것을 떠나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존립하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이해한다. 이름과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둘다 별개인 것이다. 자기근거를 갖고 있지 않는 것에다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이름이야말로 虛妄한 것이 된다. 이름만 허망한 것이냐 이름에 부..
"허망한 것으로만 존재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허망이 되버린다. 그런데 묘하게 그 허망은 그 허망에 그치지 않고 唯識實性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唯識이라고 하는 것이 묘한데 모든 인연처에서 자기 모습을 하나도 오차없이 분별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과거의 어떤 삶속에서 살지 않고 현실을 역역히 살게 되면 그 자체가 깨달음의 삶이면서 진여의 삶이면서 유식실성의 삶을 사는데 왜냐면 우리가 알려고하는 의식을 통해서 알려진 세계이기 전에 이미 모든 삶의 기재를 이루고 있는 바탕은 자체가 앎이 되어서 바로 전찰라에 삶까지도 한번도 냉정하니 부정해 버린다. 다른 인연이 오면 배고픔이 오기전까지 배고픈지 모르다가 배고픈 상황이 딱 오면 배부른 상황에 대해서는 완벽하니 잊어버린다. 우리 몸이 배고프다는 상황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