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 깨어 있게 되면 중생의 조건이 바뀌는데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우리를 중생의 조건인 아와 법의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 중생의 삶은 갖가지 이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난의 조건'에 의해 변화하는 형상과 소리와 맛 등과 만나는 세계를 고정된 틀로 연상시키는 기능을 이름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법화라고 합니다. (26) 유가 수행자들은 선정과 현실 체험을 통해서 삶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변화의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아와 법이 숨어 있지 않음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삶의 변화란 곧 앎입니다. 드러나 현상[현행]이나 드러나지 않은 흐름[종자]이나, 우리의 삶 자체는 항상 변화의 흐름일 뿐입니다. 유가 수행자들은 이를 통해서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는 이름..
1장. 체험이란 눈과 형상이 만나는 세계, 귀와 소리가 만나는 세계, 코와 냄새가 만나는 세계, 혀와 맛이 만나는 세계, 몸과 만나는 느낌의 세계, 생각의 세계입니다. 이 여섯 쌍의 만남의 세계는 현실과 선정에서 같게 또는 달리 경헙됩니다.(23) 곧 현실 체험과 선정 체험은 모두 '만남의 조건'에 의해서 경험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리는 소리도 '만남의 조건'만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남의 조건'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몸과 마음, 선정에서의 몸과 마음은 서로 다릅니다. 같은 몸과 마음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정 체험을 통해 새롭게 된 몸과 마음의 흐름만 있다는..
'지금까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도리를 위해서 유식의 성과 행상을 분별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얻은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하오니 모두 위없는 개달음을 얻으시옵소서.' "이것이 회향계인데 견도에 들어갈때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는 견도 이전에 十廻向이 완성되야 합니다. 견도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때 얻어진 모든 복덕들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이 완성되야 견도에 들어갑니다. 견도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가 얻어진 모든 복덕들을 가지고 있으면 견도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화엄의 50지죠. 그때 얻어진 모든 지를 회향해서 중생들에게 완벽하니 돌려줬을 때 견도에 들어간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묘하게 견도에 들어가게 자기가 얻어진 모든 공을 얻어서 다 회향하고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야 견도에..
"아뢰아식 속에 종자가 들어있는 것은 지금 우리 활동가운데서는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사를 넘나들때는 아뢰아식 그 자체로 정보의 한 종자로 변해버린다. 다음 찰라가 될때에는 그 힘들이 전부 합쳐져서 오늘 우리들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아뢰아식이란 것이 있어서 우리가 계속해서 동일한 아뢰아식 속에서 정보를 저장해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순간마다 어떠한 정보를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생사가 계속 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새로운 모습들의 변화만 있지 이것이 삶과 죽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여실히 알면 우리가 생사가 두려움으로 남아서 번뇌라고 경험됐지만 그 자체가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사가 아닐때는 열반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사라고 하는 정보를 잘못 읽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이 三性을 잘 알아서 삼성 가운데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측면이 항상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해야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 나의 표현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아주 뼈속 깊이 새겨놔야 한다. 내가 욕심을 내고 내가 성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낼때는 욕심 그 자체가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성낼때는 성낸 그 자체만 나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느냐는 현재적 표현 자체가 전체적인 나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남길 것인가를 잘 사유해서 세우는 아와 법으로 부터 잘 벗어난 가르침으로 살때 安樂이 온다. 평안한 열반이 온다. 근데 열반은 生死 속에서 열반인데 생사가 우리의 근본 모습이다. 우..
"의타기성 속에서 我와 法을 이해하는 변계소집성이 다하면 유식실성을 보는데 이때 완벽한 전의 즉 삶의 근거가 전환된 것이다. 변계소집성의 삶을 살아왔는데 우리는 드디어 완벽한 원성실성을 통해서 의타기성으로 사는데 그 의타기성을 사는 것이 활동 그 자체로만 사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활동하는게 아니고 하나의 손을 내밀고 하나의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전부가 표현된다. 어떤 경우에 보면 '할'을 하거나 '방'을 하거나 손을 내밀거나 눈썹을 깜빡이는 것이 실재로는 그 사람의 전부인 것이 분명하지만 뒷날보면 그러한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약간의 맛을 보고 그것이 그것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처님이 뭡니까라고 물었을때 주먹을 내민다든가 부처님이 무엇입니까 했을때 '할'을 한다고 했을때 이미 죽은 주먹이나 죽은 ..
"예를 들어 자석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북극과 남극을 가르키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를 띄고 있는 분자, 자기 자성을 만들어내는 분자는 이 자석이 될때 일정한 분자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이 열을 가하게 되면 이 자석을 띈 분자들이 정보를 잃어버린다. 즉 자기가 어떤 방향에 서있을까를 잃어버린다. 725도인가 얼만가를 가열을 시작하면 갑자기 자성이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자석이 되어있었는데 자석이 사라진 것은 분자가 자석을 띌 수 있는 배열이 바뀌면서 방향이 틀려지니까 자석의 성질이 사라져 버린다. 그때 보면 그 안에는 모든 자성을 띄는 분자들은 그대로 다 있다. 그것이 자석을 이루는 분자들이 힘을 강력히 갖고 있어서 쇠가 됐거든요. 그안에 분자들이 마치 정보가 자석화되어있거든요. 자석이 있어서..
"唯識性이라고 하는 것은 흰두교에서 브라만인 사람은 계속 브라만으로 태어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소유하고 있는 나가 브라만을 그 특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소유하는가 즉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지금 삶에 있어서 다름은 있지만 브라만이라고 하는 자아는 변해가지 않는다. 그래서 변해가지 않는 브라만이 모든 행위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브라만은 없고 행위만 남아있다. 행위만 남아가니까 전후찰라에 정보라고 하는 자기가 지어놓은 소지장과 번뇌장에 정보가 있으면 그전에는 우리가 생각할때 무엇이 정보를 소장하고 간다라고 생각하는데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이 정보만 남아있다. 그래서 이 정보에 새로운 정보가 오면 정보의 장이 변화가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