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내가 참 좋다 "나를 사랑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의 나이고 또 하나는 이상의 나입니다. 현실의 나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결심을 해도 실천을 못하지만 이상의 나는 아침에 벌떡 일어나고 결심하면 그대로 실천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현실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나'를 높이 세울수록 '현실의 나'를 미워하게 되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초라하고 왜소해집니다. 그러니 이상의 나를 버리고 현실의 나를 긍정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다. 설령 조금 부족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괜찮습니다. 자기 긍정의 바탕으로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자신을 바꿔 나가면 됩니다. 있는 그래로의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자기 사랑의 시작..
기도는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 이 세상에는 기도해 도 온갖 일이 일어나고 기도를 안 해도 일어납니다. 세상 일은 기도와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사건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근야 일어나는 사건일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좋은 일이 되기도, 나쁜 일이 되기도 할 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로 바라보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를 바르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해결책을 찾고 다른 사람들이 허둥대더라도 나는 의젓하게 지낼 힘이 길러집니다. (지금 이대로 좋다. 255)
T. 게임 중독을 "규범을 의심하는 건강한 반작용"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게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게임을 못하게 하는 부모[또는 부부간의 불화]와 게임을 통한 어떤 해방구를 찾는 아이의 연관성의 작용을 주목한다. 아이의 게임 몰두가 가정의 문제가 된다면 이러한 관점을 추천한다. "자신의 처지나 세상의 상태에 대한 슬픔은 반드시 병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그저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점, 뭔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슬퍼할 어떤 이유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건강함의 표시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2. 친구 스위스의 작가긴 아돌프 무쉬그의 책에서는 '병이란 규범을 의심하는 건강한 반작용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인용은 정말 탁월하게 어울리는 군요. 왜냐하면 그 인용은 질..
1. 내가 제안하는 바는 선생님들이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 학생들의 머릿속을 자신의 생각으로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고 자신도 아는 것이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수업을 들어간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금언에 기반 한 소크라테스식 무지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근본적인 무지의 태도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비하면 이 정도만 해도 이미 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식의 무지자는 뭐를 하나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1.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집착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방석을 가지런히 놓는 것은 내 할 일이고, 어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친구를 위해 법문을 들으라고 하는 건 내 할 일이고, 오고 안 오고는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 다른 사람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답답하면 281) 2. '정토회'에서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는 말을 합니다. 일을 하니 집착하게되고 , 집착하니 수행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마음 관찰하기가 쉽겠지는데, 일을 하다 보니 거기에 집착해서 마음 관찰이 잘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