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 자기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를 제외하고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T1000.0 : 가 시작된다. 스피노자는 정의 끝에 '나는~이해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새겨볼 점이라 생각한다. 첫번째 정의는 자기원인. 기하학적 증명을 위해 원인이 필요하므로 자기원인을 첫번째 출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의 자기원인이란 예를 든다면 오행 같은 것이 아닐까. 목화토금수의 오행. 목은 흙을 뚫고 나오는 목의 본질이 나무라는 존재를 포함하며 나무라는 것들과 그와 같이 표현되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본성이 생각될 수 없기에. 허나 나무는 자기원인이 아닌데, 나무가 목의 존재로 증명되기는 하나 나무가 없어진다고 본질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목..
스피노자가 쓴 의 시작은 이렇다. '기하학적 질서로 증명되고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다음의 내용들을 다룬다.' 기하학적 질서. '윤리학'이란 제목을 단 이 책은 '모든 것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라고 말하며 그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그 형식은 앞의 정의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이 결과[정리]를 낳고 그 결과가 원인[정리]이 되어 무한히 연쇄하는 기하학적 질서로 쓰여진다. 즉 내용도 그것을 말하고 있고 형식도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합일. 독창적이고 대단하다.
음악과 거래 간의 보다 구체적인 유사점을 들 수 있습니까? 악보는 잘 정의된 체계입니다. 다양하게 변화되어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시장과 약간씩 변화를 가진 채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한 곡이 조용하게 시작됩니다. 주제가 들어서고, 그리고 클라이맥스로 점차 상승합니다. 시장에는 가격 보합이 있고, 주 트렌드가 생기고, 주요 지점이나 고점으로 가격이 움직입니다. 악보가 펼쳐지지 않았을 때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장에서는 상황이 어느 정도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연습을 할 수는 있지만, 악보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는 저점에서 사고 고점에서 팔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악보(거래)를 이전보다 더 잘 연주하는 것을 희망할 뿐입니다. ..
관觀은, 이렇게 인식되어진 것들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것이 첫째입니다. 어떤 식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보는 것입니다. 그냥 보되 떡을 나누는 마음으로 봅니다. 어울리는 마음으로. 어울림에 가장 좋은 것이 뭐냐면 노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학교 교육을 한 이십 년 가까이 받다보니 놀 수 없게 됐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게 안됐습니다. 배우는 것이 놀이가 되지 않으니까 짐이 됩니다. 그런 습성이 명상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뭣을 얻으려고. 그냥 그것이 재미있게 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 스스로 재미있도록 보는 것이, 그냥 재밌게 되는 것이 자재自在입니다. 자재를 보는 것입니다. 자재를 본다. 자재는 뭡니까. 법계가 지 인연 처를 만나 인연대로 흘러갑니다. 인연의 흐름을 내식으로 조정하려고 하면 놀이..
그러므로 마명 스님의 가르침을 학습한 수행자는 광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에 다 들어 있으며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믿고, 스스로의 마음을 잘 살펴 알아차리면서 마음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행이 마음을 얻는 진여 법성의 공덕과 상응하는 실천이며 자비의 실천이 되겠지요. 소중한 삶이지만 집착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소중한 삶을 살 수 있고, 귀한 삶이지만 오만으로 넘어서지 않아야 삶이 귀하게 되지요. 마음 살핌이 이 경계를 넘어서지 않게 합니다. 살핌과 알아차림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충분한 통찰로 무엇이 소중하고 귀한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헛된 것으로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헛된 것으로 귀하고 소중한 삶을 치장하느라 마음이 바빠지면 귀하고 소중한 자신의 ..
회향게에서 "법성과 같이[如法成]"라는 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마명스님께서도 을 써서 얻게 되는 공덕이 있다면 "우주 법계의 진여공성이 온갖 생명들을 위하여 아무런 바람 없이 베풀고 있는 것과 같이[如法性]" 회향廻向하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룸'이면서도 그것이 법계의 '이룸'일 수밖에 없고, 이룸 또한 언제나 무상한 것이라 이루면서 비우게 하지요. 비운 나의 '이룸'을 법계의 '이룸으로 바꾸는 것이 법성과 같은 이룸입니다. 법성이 중생계를 이롭게 하는 회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덕德이라는 뜻이 '마음을 얻음[得心]'이듯, 법계의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비운 마음으로 맑고 따뜻한 기운을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얻는 공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런 바람 없이 주는 마음 나눔이 ..
마음마다 법성의 공덕이 빛나는 알아차림으로 나타난 것인 줄 믿는 그 마음야말로 부처를 다 드러낸 마음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나눔'이 공덕인 줄 사무치게 아는 마음이 대승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며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이웃에 대한 감사함이며 함께 소중하고 귀한 삶을 사는 바탕이 됩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소중히 간직하여 받아들이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고 비방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해칠 뿐만 아니라 이웃까지를 해치게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동일성의 독립된 실재가 이웃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 것처럼 사유되는 업식의 허위가 시대를 넘어 전달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차이를 드러내게 하는 이웃들에 의해서 '나'도 설 수 있고, 나의 내적인 차이에 의해서 생명활동과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