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것으로만 존재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허망이 되버린다. 그런데 묘하게 그 허망은 그 허망에 그치지 않고 唯識實性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唯識이라고 하는 것이 묘한데 모든 인연처에서 자기 모습을 하나도 오차없이 분별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과거의 어떤 삶속에서 살지 않고 현실을 역역히 살게 되면 그 자체가 깨달음의 삶이면서 진여의 삶이면서 유식실성의 삶을 사는데 왜냐면 우리가 알려고하는 의식을 통해서 알려진 세계이기 전에 이미 모든 삶의 기재를 이루고 있는 바탕은 자체가 앎이 되어서 바로 전찰라에 삶까지도 한번도 냉정하니 부정해 버린다. 다른 인연이 오면 배고픔이 오기전까지 배고픈지 모르다가 배고픈 상황이 딱 오면 배부른 상황에 대해서는 완벽하니 잊어버린다. 우리 몸이 배고프다는 상황을 만..
"어떤 한가지 모습도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이루는 근본바탕은 虛妄이지만 바꿔말하면 어떠한 것도 집착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원래적 삶의 바탕이다. 그것이 수승한 다른 어떤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일체 모든 삶에서 자유롭게 살게되면 동시에 허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삶에 대해서 편안한 삶, 안락하고 열반의 삶을 살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 자체가 근원적으로 허망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허망이라고하는 단어도 우리가 생갹해 왔던 과거의 기억들에 연속성이 삶에 기초해서 그런 삶이 계속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허망하다라고 하는 의미에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허망하기는 하되 그 허망은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적 의미체계의 허망과는 전혀 다른 허망이다. 이것이 허망하면서 虛라고 하는 것은 ..
"예를 들어 과거의 모든 생각들을 다 그치게 되면 현실에 경험하는 영역들이 다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도 바뀌고 보이는 대상도 바뀌고 들리는 소리도 다 바뀌게 된다. 과거에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그때는 현실이였죠. 그 현실의 경험을 토대로해서 쌓아놓은 相인데 이 상이 해체되게 되면 현재 경험조차도 상을 만들어 내지 않게 된다. 과거의 상으로 자유스러워지지만 현재도 다시 미래를 규정하는 상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때가 비로서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니까 상무성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상만 무성이 아니라 현재 삶에 있어서도 철저히 상을 남기지 않아야되는데 우리 행위가 여습을 남지기 않는 것이다. 따라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기억했던 모든 행동들이 습관적으로 남아 있는 것인데 선으로 산다. 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을 지배하는 힘으로 존재해서 이것 자체가 구체적인 삶의 특성으로 존재한다라고 보는 것은 왜 나는 욕심내는가 왜 나는 화를 내는가 묻지 않았을때는 바로 그렇게 된다. 계속 들여다보니까 이 물건이 욕심나는 물건이다라고 하는 것은 인류사회가 이뤄놓은 광고 효과 즉 이미지에 의해서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그 물건이 가치 있다라고 여겨 주어진 그 상황에 의해서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이야몬드는 영원히라는 걸 갖고 다이야몬드를 팔아서 세계 모든 선남선녀들에게 그 다이야몬드가 최고의 보석으로 가치를 남게 했는데 실재 다이야몬드는 물리적 속성으로 영원하지 않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일반적으로는 다른 것보다 강하게 보이지..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해 그런 것이지 열등한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맞는 공부방식이나 선생님을 만나면 갑자기 실력이 폭등하는 사례를 보듯이 언제든 인연을 만나면 성장할 가능성이 늘 있는 것이다. 생긴 모습이 다 다르듯이 각자의 씨앗이 달라 각자 성장할 수 있는 인연이 또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을 달리해보는 경험을 많이 해봄으로서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씨앗은 무한한 기운을 함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기운들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을 알게 되는 때는 인연을 따라 기운이 나툴때 비로소 알게된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는 수많은 인연을 만들면서 알게된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자신을 꽃피울 수 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인연이 교과서처..
그것은 인연따라 모양을 바꾸는데 따로 모양이 있어 바꾸는 것이 아니라서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는 모양이다.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는 모양을 모양이라고 이름하나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소립자가 전체로 보면 파동이고 낱낱으로보면 입자인데 전체로보는 것과 낱낱으로보는 것이 소립자에게는 인연이되어 이런 인연일때는 파동으로 저런 인연일때는 입자로 그 모양을 나투는 까닭에 소립자를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면서 파동이면서 입자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생과 삶이 일치하는 것인데, 생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무상한 흐름으로 흐르고 있는데 삶이 있음 만을 보고 있음이라고 하거나 없음만을 보고 없음이라고 할 때마다 둘은 어긋난다. 생이 본래 그러하므로 삶은 따로 자각할 것이 없어..
"반야라는 하는 것은 매순간순간 마다 자기가 일어나는 모든 사유를 그 자체로 부정하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지혜의 작용이 현실에 삶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반야는 무엇을 말하는 게 아니고 모든 삶속에서 말해진 자취를 스스로 지우면서 다음 찰라에 말이 일어나도록 하는 바탕을 만들어준다. 말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그 말이 해체된 쪽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복덕이라고 하는 말이 있으면 그것은 복덕이라고 하는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복덕으로 존재한다고 이야기 할때 卽非福德이라고 이야기하고있다. 福德性, 이 性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리를 갖지 않고 자기자리를 해체하는 반야와 지혜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그것이 복덕으로 드러나 있다고 하는 언어표현으로 구체적으로 여기서 이야..
"부처님께서 내가 觀하는 방법이 다른 수행자들과 더불어 다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관하는 방법은 세계는 의타기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어울려서 생명을 이루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존재에 의해서 너는 무엇이다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없다라고 세상을 보는 그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T1000.0 : 회통학. 본 블로그가 연구하는 배움을 회통학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데, 이유는 여기서 말하듯 세상을 이타기성으로, 관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길이 있어 결국엔 다 만나듯이 회통학은 모두 다 다르기에 더 풍요롭다. 그런 관점에서 노자, 부처, 장자, 세친보살, 혜능, 스피노자, 니체, 비트겐슈타인, 들뢰즈와 가타리, 마뚜라나 등이 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관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