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일상은 사건, 사물들을 분별하여 알아차리고 기억하며, 다음 상황에 대해서 예측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일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할 수도 있고 습관적으로 하기도 하겠지요.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알아차릴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는 것이라 현재의 일이 과거와 같고, 미래 또한 상속되는 과거이겠지요. 현재를 살면서 현재를 놓치는 것입니다.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한 생각에 담겨 있는 삼세를 보는 것이며, 삼세를 만들지 않는 분명한 판단으로 삼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없는 현재는 현재일 수 없습니다. 습관적인 마음에는 '분명하게 분별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면서 삼세를 창조하는 지성智性의 작용'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며, 분별된 것과 기억된 ..
비유하면 목화금수는 흙그릇의 모양이고 토는 흙이다. 목화금수가 봄여름가을겨울로 그릇 모양을 표현하므로 각각이 다르지만 다 흙이라는 바탕에서는 같다. 모든 그릇의 모양과 흙이 하나이며 동시에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본모습이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뛰어난 게 아니다. 봄이 여름보다 뛰어나지 않으며 가을이 겨울보다 모자란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실재하는 모습 자체가 완전한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이 있을 뿐이다. 봄여를가을겨울 어떤 것도 무엇이 있어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하나하나 자체가 변하는 본모습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이 인연 조건에 따라 오행을 나투고 있다. 하나하나 생명이 오행을 표현하고 있고 다시 하나하나 생명은 뭇 생명 전체로 어울린..
1. 자량위-가행위-견도위-수습위-구경위 성소작지/묘찰관지/평등성지/대원경지 견도위에서 묘찰관지와 평등성지가 구경위에서 성소작지와 대원경지가 이뤄진다. 2. 망념에 물들었다는 것은 망념의 습관이 강하다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망념이 본래 없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습관이 된 망념의 관성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하면 궁극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자성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을 해오解悟라고 하고, 망념의 관성 곧 잘못된 분별 인식에 젖은 흔적을 온전히 제거했을 때를 증오證悟라고 하는데, 증오를 성취하여야만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시각始覺으로 미세한 망념의 흔적을 지우고 날 때 비로소 연기의 각성을 볼수 있고, 본각을 체득한 증오가 되어야 자성 없는 연기 공성의 지혜와 무량한 자비 방편을 실전할 수 있는 지혜를 ..
'지금까지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도리를 위해서 유식의 성과 행상을 분별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얻은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하오니 모두 위없는 개달음을 얻으시옵소서.' "이것이 회향계인데 견도에 들어갈때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는 견도 이전에 十廻向이 완성되야 합니다. 견도에 들어갈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때 얻어진 모든 복덕들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이 완성되야 견도에 들어갑니다. 견도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가 얻어진 모든 복덕들을 가지고 있으면 견도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화엄의 50지죠. 그때 얻어진 모든 지를 회향해서 중생들에게 완벽하니 돌려줬을 때 견도에 들어간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묘하게 견도에 들어가게 자기가 얻어진 모든 공을 얻어서 다 회향하고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되야 견도에..
"아뢰아식 속에 종자가 들어있는 것은 지금 우리 활동가운데서는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사를 넘나들때는 아뢰아식 그 자체로 정보의 한 종자로 변해버린다. 다음 찰라가 될때에는 그 힘들이 전부 합쳐져서 오늘 우리들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아뢰아식이란 것이 있어서 우리가 계속해서 동일한 아뢰아식 속에서 정보를 저장해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순간마다 어떠한 정보를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생사가 계속 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새로운 모습들의 변화만 있지 이것이 삶과 죽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여실히 알면 우리가 생사가 두려움으로 남아서 번뇌라고 경험됐지만 그 자체가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사가 아닐때는 열반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사라고 하는 정보를 잘못 읽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이 三性을 잘 알아서 삼성 가운데 의타기성이라고 하는 측면이 항상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해야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 나의 표현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아주 뼈속 깊이 새겨놔야 한다. 내가 욕심을 내고 내가 성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낼때는 욕심 그 자체가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성낼때는 성낸 그 자체만 나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느냐는 현재적 표현 자체가 전체적인 나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남길 것인가를 잘 사유해서 세우는 아와 법으로 부터 잘 벗어난 가르침으로 살때 安樂이 온다. 평안한 열반이 온다. 근데 열반은 生死 속에서 열반인데 생사가 우리의 근본 모습이다. 우..
無常은 常見과 斷見 사이의 치우치지 않는 中道인데 상견[생]이 아니면서 단견[멸]도 아니고 상견[생]이 아닌 것도 아니면서 단견[멸]도 아닌 것도 아닌 묘한, 말로 포착할 수 없는 흐름의 양상이다. 음양을 추상할때 -- ― 으로 표현하는데 음의 표현은 단견을, 양의 표현은 상견을 추상한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은 氣의 흐름으로 표출되는데 기를 이야기할때 생하고 멸한다고 하지 않고 모이고 흩어진다고 한다. 이는 기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임을 표현한다. 음양은 실체가 없으며 현상으로만 존재하며 그 자체가 활동이다. 항상 활동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음과 양에 머물지 않는 중도로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활동이 곧 중도이다] 언어를 빌어 음과 양이 음으로만 양으로만 표현될때가 있더라도 음으로만 있을..
"의타기성 속에서 我와 法을 이해하는 변계소집성이 다하면 유식실성을 보는데 이때 완벽한 전의 즉 삶의 근거가 전환된 것이다. 변계소집성의 삶을 살아왔는데 우리는 드디어 완벽한 원성실성을 통해서 의타기성으로 사는데 그 의타기성을 사는 것이 활동 그 자체로만 사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활동하는게 아니고 하나의 손을 내밀고 하나의 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전부가 표현된다. 어떤 경우에 보면 '할'을 하거나 '방'을 하거나 손을 내밀거나 눈썹을 깜빡이는 것이 실재로는 그 사람의 전부인 것이 분명하지만 뒷날보면 그러한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약간의 맛을 보고 그것이 그것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처님이 뭡니까라고 물었을때 주먹을 내민다든가 부처님이 무엇입니까 했을때 '할'을 한다고 했을때 이미 죽은 주먹이나 죽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