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세계를 만들어 이해하는 방법이라든가 자기가 만든 얼굴의 특성이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서 그 스스로가 그 과보를 받고 있고 과보를 받은 것에 그쳤으면 괜찮겠는데 우리가 다시 현행 무명이 작용해서 다시 스스로의 내일에 과보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 업습기와 이치습기라고 하는 것이 서로 합쳐져서 어제의 우리 삶이 한번 죽음을 통했다면 내일의 우리 삶을 만들어간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가 앞과 뒤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상에서는 한번도 다름없이 자기 삶을 자기 스스로가 구성해 낸다. 그러니까 한번 마음 가운데서 무엇인가 탁 일어나면 그 마음 가운데서 아집과 법집이라고 하는 것이 따라다닌다. 아집과 법집이 일어난 것 자체는 구생기가 현행한 것이다. 그..
"지금은 우리 얼굴이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잠을 자기 전까지 정진을 쭉하다가 갑자가 어느 특별한 상황이 들어가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면 수행력이 갑자기 강해지니까 이 제팔식 장속에 들어있던 선악업의 종자 내용이 현저히 바뀌게 된다. 그러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제육식이 한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게 됐죠. 살아나게 되면 얼굴이 확 변하게 된다. 그러면 그 전의 얼굴과 이 얼굴을 비춰보면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그러니까 얼굴 형태는 비슷하다할지라도 얼굴에서 주는 그 느낌이나 어떤 받는 것이 달라졌다. 그러면 아주 작은 차이지만 현재 살아있으면서 異熟을 경험하게 된다. 무슨 이숙이냐 자기 업이 바뀌어서 지금 보면 얼굴을 만드는 업이 된다. 근데 정말 우리가 칠식까지도 바뀌어서 육식에 있는 몸이..
"我執과 法執을 모르는 것은 근원적으로 無明이라고 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무명이 모든 사물을 제한시켜서 보는 특징이 된다. 이 무명은 흔히 말하는 지성이다. 무엇을 알아채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는 성품이다. 우리가 지성인, 지성인 하는 지적인 활동을 하는 특성은 실상에 있어서는 무명이다. 무명은 뭘 모르는게 아니고 알기는 알되 잘못 이해하는 것. 무명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칠식에서 작용하는 항행불공무명이라고 하는게 있고, 이것은 항상 작용하고 있는, 행은 작용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 무명이라고해서 이것은 자아를 아집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항행불공무명이라고해서 제칠식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는 무명이 있다. 근데 제칠식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이 뭐냐면 유부무기라고해서 무기라고하는 것..
"언어와 마음의 활동을 다 멸하는 것을 止라고 부른다. 언어쓰임과 마음활동을 다 그치고나서 가만 있으면 안되고 그 가운데 새롭게 판단해야하는데 이 새로운 판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학습이다. 특히 정문학습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져 있는 모든 판단의 근거를 해체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그 힘은 우리의 의타기성 자체가 분별의 힘이 내부적으로 작용되면서 이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의 궁극적인 자립적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眞如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된 내용을 통해서 잘들여다 보면 의타기성 스스로가 나는 자성이 없다라고 하는 무자성의 내용을 비춰주는 것이 진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언어다. 이 언어를 통해서 학습되어진 것과 언어가 일치해서 우리는 깨..
"그래서 의타기성, 즉 꽃이 피고하는 하나의 사건이 우주적 모든 인연이 그 꽃을 꽃이게 만들어준 의타기성의 인녕도 있기는 하지만 또한 아울러서 변계소집성을 만들어 내게하는 그런 인연도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별업과 공업이 어울려져서 한 개체개체 삶을 삶되게 이끌어가는 힘들이 전전력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근원종자가 因이라고 한다면 주변에서 펼쳐진 모든 힘들은 緣이라고해서 인과 연이 만나서 한 개체에 삶을 이끌어가는데 그것은 변계소집성도 그렇고 의타기성도 그렇다. 피피분별, 가지가지 분별이 생한다할때 분별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의타기성도 마찬가지 분별이고 변계소집성도 마찬가지로 분별이다. 근데 의타기성은 저절로 인연처에서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서 자기 변화를 끊임없이 해가는 것인데..
"우리가 활동하는 모든 양은 전오식과 합쳐진 제육식상에서 활동들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일체종식인 제팔식이 실재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종자를 어떻게 만들고 있느냐하는 현재의식이 가장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팔식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느냐, 만일 이 팔식이라고 하는 것이 종자를 함장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 또 만일 종자가 있으면서 그가운데 우리가 수행해 놓은 힘들이 그 종자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T1000.0 : 우리가 제8식의 종자의 발현으로 모습을 이루고 있지만 종자는 지금도 제육식의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제육식이 중요하다. 즉 8식에 함장된 종자의 영향력을 바꾸는 힘은 제육식..
"그래서 견분과 상분이 식속에 함께 있을때 이 두가지는 실재로 둘이지만 나눠지지 않는 상태에서 상분에 얼굴을 하고 견분이 자기 앎을 드러내고 앎을 통해 상분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서 둘이면서 둘이 아닌 상태로 보여지는 이것 자체가 의타기성으로 연기적 실체인데, 이 두개가 마치 다른 것으로 있는 양 파악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의타기성이라든가 팔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변계소집을 하든 변계소집을 하지 않든 삶의 흐름의 근저를 이루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철저히 의타기성은 본래적인 요소고 변계소집성이야말로 중생이라고 하는 특별한 삶을 구성하는 특징이 된다." T1000.0 : 마뚜라나의 책 의 책 제목을 두고 말해보면 의타기성은 "있음에서 함으로"..
"수행자는 철저히 자기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설사 이것이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좋은 것 자체도 궁극적으로 좋다라고 하는 것들이 내재되어 있는 제팔식속의 잠재되어 있는 자아의식을 잘 이끌어 낸다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좋은 일을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뭘 묻냐면 자아를 더욱 굳건히 해가는 것이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손상이 오는 것이다. 실재 그것은 손상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되어 지는 것을 나쁘다고 한다.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을 근거 지운 것 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자기 활동에 동일성을 유지해가려고 하는 측면에 있어서의 작용이다. 좋은 생각도 그치고 나쁜 생각도 그치는 것이 수행의 가장 큰 출발점이라고해서 육조단경의 혜능스님의 첫설법이 그것이다. ..